2025.03.09. 주일오전예배, 요한복음 5:1-16,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 khc289
- 3월 9일
- 2분 분량
표적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가요? 자신이 원하는 표적과 기사가 있어야 믿겠다는 신앙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습니다. 바야흐로 유대인의 명절(εορτη;헤오르떼)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정말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의의가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 얼마나 유대인의 명절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목을 매는 일에 있어 당시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양문 곁에(προβατικος) 베데스다라 하는 못인 바,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장소는 신성시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 연못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쯤 되면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소망과 믿음 즉 미신과 맹신이 팽배해 지는 것이죠. ‘오늘 이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날 거야!!!’ 그래서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헛된 소망과 미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사건은 그와 같은 전례를 보이고고 다시금 표적과 기사가 아닌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른 믿음에 서도록 예수님이 한 병자를 택하십니다. 그는 서른 여덟 해 동안에 병자로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일어나, 그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낫게 한 분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그를 만나 주시고 그에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가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그 병자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낫고자(υγιης;휘기에스, 완전하고자) 하는 그 병자의 소망과 의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낫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로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누워있던 그 자리(κραββατος;끄랍바또스)는 38년이나 되었는지를 몰라도 더럽고 수치스럽고 조악하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자리를 그 곳에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들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음을 입은 병자는 율법 정확하게는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율법주의를 어긴 것입니다. 그렇게 자칫 미신이 되었을 천사는 만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온전해진 그 병자는 하나님의 전인 성전을 찾고 성전을 찾았기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게 되고 자신을 낫게 하신 분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던 저 성한 유대인들에게 가서 거침 없이 담대하게 자기를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합니다(αωαγγελλω;아낭겔로).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도 여전히 동일합니다. 참 소망 대신에 미신을 맹종하고 세속적 욕망과 자랑을 위해 끝도 없는 갈등과 분쟁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우리 모두가 영원히 죽습니다(마10:28 참조). 오늘날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시대와 세상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삶의 자리가 여전히 동일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삶의 자리의 무게는 여전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자리가 무겁더라도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과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함께 걸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