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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4. 주일오전예배, 마태복음 11:7-19, 광야에서...

  • 작성자 사진: khc289
    khc289
  • 2022년 7월 24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8월 6일

1. 광야에서 신부(성도)의 삶

1) 광야의 삶에서 지성(知性)으로 찾아야 할 것

예수님은 묻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 광야의 삶은 인간의 힘으로는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닙니다. 광야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잡혀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부귀영화도 아닙니다(8).

그렇다면 광야에서는 무엇을 봐야 할까요? 선지자입니다(9a).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옭게 전하는 선지자를 봐야 합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요1:14)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칭함을 받습니다.

선지자는 - 사도 바울도 표현하듯 - 말씀과 그리스도를 성도에게 중매(고후11:2)하는 중매자 역할을 합니다.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광야에서는 선지자 종국적으로는 말씀과 그리스도를 구해야 합니다.

2) 광야의 삶에서 감성(感性)으로 추구해야 할 것

그런데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를 성도에게 중매한 세례 요한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11b)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앞에서 보았듯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친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친구의 위치와 지위보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고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신부가 더 큰 위치와 지위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구약 곧 옛 언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것은 세례 요한 때까지인 바(13), 그는 옛 언약 하에 속한 옛 언약백성입니다. 옛 언약백성이든 새 언약백성이든 모두가 구원을 받지만 받은 은혜는 옛 언약백성보다 새 언약백성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보다 큰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침노해야 합니다. 그 만큼 신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뜨거워야 합니다. 또한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받은 은혜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에 감사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3) 광야의 삶에서 영성(靈性)으로 행해야 할 것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함에도 불구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광야에서의 삶이라고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혼인집 잔치를 베풀며 피리를 불며 초청하고 있는데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17a). 죄에 대해서 통회하고 영적 사망을 두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세대를 두고 통회하며 슬피 울고 광야에 나가 회개의 세례(막1:4)를 선포하셨습니다(18). 그리스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랑이 되어(마9:13-15)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셨습니다(19a).

광야에서의 삶에서는 이면과 내세에 엄연히 존재하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고 지금부터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두고 통회하며 슬피 울고 회개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해야 합니다.

2. 광야에서의 성도의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를 늘 찾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늘 추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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