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0. 종려주일예배, 요한복음 12:12-19, 종려나무의 영성
- khc289
- 2022년 4월 10일
- 2분 분량
1. 사람들의 의도 vs. 하나님의 계획
13절의 말씀은 시편 118편의 인용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시118:25-26을 인용하고 있다면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산나(ωσαννα)를 칭호 내지는 감탄사로 알고 있는데 이 표현은 'הושיעה נא(호쉬아 나)' 곧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직역하자면 제발,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명령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유대인이 왕국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군사적, 정치적 왕으로 삼고자 하였던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듯 그러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입성에 환호했던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의 말이 재확인시켜 줍니다. 19절입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나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했나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치던 것과 다르게 하나님의 계획은 더 지고하고 더 근본적인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슥9:9을 보았을 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군사적 메시아가 아닌 겸손히 고난 받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야만 '양 떼 같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왕관의 빛나는 보석같이 영화롭게 할 수'(슥9:16)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영화는 세상이 절대 줄 수 없습니다. 지고하고 근본적인 구원과 영광은 오직 메시아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시고자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2. 종려나무의 영성으로 따르는 십자가의 도
푸르고 우아하게 하늘을 향해 자라는 종려나무는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소망 가운데 은혜 속에서 성장하는 영혼에 대한 적절한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 사람들의 의도와 달리 - 종려나무는 세상 권력에 대한 투쟁과 승리 그리고 쟁취된 하나님 나라의 영화 그리고 회복과 구원을 이루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영웅 곧 히어로(hero)를 만들어 자신을 대입하려는 욕망과 욕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면 참된 자유와 해방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환상 속에서 쾌락을 누리고자 헤로인(heroine)을 만들기까지 하겠습니까? 드라마나 영화나 게임 같은 데서 보듯 우리의 모든 환경과 문화는 쾌락을 지향하며 욕망과 욕구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고도의 궤계입니다.
성도들이 구해할 것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더 지고하고 근본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더 지고하고 근본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들리신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는 더 지고하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들에게 이를 주시고자 하심 때문입니다.
욕망은 영혼을 좀먹는 마약입니다. 욕망을 죽일 수 있는 길은 더 지고하고 근본적인 것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가치를 두는 삶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지고하고 근본적인 삶을 추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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