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8. 주일예배, 마태복음 26:57-68, 예수님의 결단과 순종
- khc289

- 2021년 7월 9일
- 3분 분량
음지에서 불의를 저질러 왔던 전현직 대제사장들이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획책하여, 이제 또 다른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자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처음 결의했을 때,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라고 했었던 그들이었습니다(마26:4-5). 이는 유월절을 거룩히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란이 일어날까봐,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까봐, 권력에 타격을 입을까봐, 유대인의 명절을 피하려고 하였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셔야 했기에, 이 유월절에 자신을 저들의 손에 잡히게 하십니다. 이는 철저히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회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그들의 손에 잡히게 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저들에게 잡히시겠다고 결단하지 않으시면, 험난한 시간과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죄인들의 손들이 자신을 붙잡도록 결단하십니다. 그리고 인류구원을 이루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요한의 증언처럼, 이 때 사탄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가룟 유다도 마귀였습니다(요6:70).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예수님의 일행과 같이 한 가룟 유다는, 군대와 저들의 아랫 사람들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데리고 옵니다(요18:1-3). 예수님은 당할 일을 아시고도, 자신을 잡으러 온 저들에게 '내가 그다(εγω ειμι)'(요18:5; 8)라고 하십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저들에게 잡히신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사51:22-23입니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반드시 마셔야 하는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그 잔을 원수에 손에 두시는 겁니다. 그렇지만 비틀거리게 하는 잔은 비워야 합니다. 누군가는 마셔야 잔을 넘길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진노의 잔을, 그의 기름부음 받은 독생자가 받아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사53:12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아멘!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그의 독생자, 예수님이 마시려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라고 외치실 것이고, 예수님은 분명 이 때 버림을 받으실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에 기꺼이 결단하고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어찌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신 그리스도께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이 잔을 들겠다 결단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최후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 예수님은 가야바의 이 비열한 질문의 의도를 알고 계셨지만,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다'(64a) 침묵하시던 예수님이, 회중과 가야바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십니다. 앞으로도 이 대답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사형을 언도하라고 주장하게 됩니다(요19:7). 그런데 실상은 이 질문-대답(Q&A)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강요하듯 맹세케 하지만, 이미 이 강요를 통하여 가야바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κατα του θεου του ζωντος) 간청하고(εξορκιζω)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형식적으로 두 세 명의 증인을 세웠고, 최고 중죄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죄로 몰아가는, 비열한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열한 심문에, 죽음을 불사하고 하나님 아들로서 심판선포을 결단하시며, 담대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가야바에 동조하는 저들은 이 심문으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65-66).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기소된 이상, 죽음을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인간취급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저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67-68, 눅22:63-64)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조소합니다.
저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때,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얼굴과 몸은, 더 더러워지고, 더 멍들어 갔으며, 더 많은 욕설과 조롱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죄인이라 단죄했던 저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듣고, 맞고, 아파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이 모든 수모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존엄하신 분에게 있을 수 없는 수모와 고난을, 그 자신이 감당하시겠다고 결단하시고, 주님의 구속계획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던 겁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에게 끌려가심도,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단이었고, 순종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노의 잔을 마시겠다고 하심도,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단이었고, 순종이었습니다. 불의하고 불법적이며 형식적인 심문을 받으신 것도,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단이었고, 순종이었습니다. 하찮은 죄인들에게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수모와 고난을 당하신 것도,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단이었고 순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로의 입성은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였고,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결단의 걸음을 늦추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자리로 더 가까이 나아가셨으며, 결국 십자가에 이르시게 됩니다. 결단과 순종은 불의와 악의의 철옹성을 깨는 시작입니다. 결단과 순종은 최선의 믿음의 반응입니다. 결단과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에서 이루어 드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결단과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