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1. 주일예배, 스가랴 1:7-17,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
- khc289
- 2021년 7월 9일
- 3분 분량
'그 분(The One)'은 깊음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 깊음은 음부의 권세가 있는 곳,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인해 죽음이 관영한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되었고, 사망으로부터 구속되어 죽음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속량과 구속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말 탄 분의 뒤에는, 붉은 말들, 자줏빛 말들, 흰색 말들이 있습니다. 붉은 색은 전쟁, 재앙, 죽음, 기근(삼하1:24 , 잠23:29, 렘4:30, 계6:4 )을 상징합니다. 자주색은 고귀함, 부요 등을 상징하는데(삿8:26, 에8:15 , 겔23:6), 우리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로마 병정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해 입혔던 옷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색깔이었습니다(막15:17 , 요19:2). 흰색은 승리와 성결을 상징(계3:5, 계7:9 )하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승천하심을 연상케 하는 색깔입니다.
스가랴가 이 말들에 관해, 주님에게 묻자, '내게(내 안에서) 말하는 천사'가 스가랴에게 '그것들이 무엇인지 네게 보여 줄 것이다'(슥1:9b) 라고 하십니다.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었는데, 10절을 보니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그 분(The One)'이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라'라고 하십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성부 하나님, 내게 말하는 천사 성령 하나님,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그 분(The One) 성자 하나님이, 삼위의 하나님으로 이상 가운데, 스가랴에게 임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보냄을 받은 자들이 '그 분(The One)'에게 보고합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들은 '그 분(The One)'의 열 두 사도요, '그 분(The One)'의 제자요, '그 분(The One)'이 머리되신 교회요, '그 분(The One)'의 몸된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로 인해 세상은 평안하고 조용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안식과 화평을 선포하고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분(The One)'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평안과 안식과 영생을 이루셨기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평안과 안식을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참된 평안과 안식을 선포하고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절 이하에서는, '그 분(The One)'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심화하고 있습니다.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낸 자들로 인하여 땅이 안정되어 조용하다고 하니,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만군의 여호와께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말합니다. 70년의 세월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로 종된 노릇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동안, 세상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갇힌 자'들의 놓임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13절을 보면 이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다'고 하십니다. '화석류 나무에 선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와께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12b) 곧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중보하심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던 겁니다. 스가랴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반응'을 이상으로 경험하였던 겁니다.
여기서 쓰인 '위로(נחום; 니쿰)'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רחם;라캄)'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위로, 긍휼, 안위, 질투, 풍부, 한결같음' 등을 의미하며, 오늘 본문에서만 직, 간접적으로 7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불쌍히 여기심'에, 13절에서 '위로'에, 14절에서 '질투' 곧 '너무나 사랑하심'에, 16절에서 '불쌍히 여김'에, 17절에서 '풍부'와 '안위'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한결같은 큰 사랑으로, 질투하시듯,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세상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위로를 날마다 선포하시며, 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있으니 돈으로도, 열심으로도, 지식으로도 더 나아가 목숨으로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위로를 넘어 은혜라 말씀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신, 대속의 은혜입니다.
'외쳐 이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선포하고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본절을 통해 세 번째 사명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렇게까지 선포되어져야 할까요? 히브리어에서도 동족목적어로 의미를 강조하는데, '질투하다'에 해당하는 단어군을 가지고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קנא; 카나)는 '질투하다, 열심을 내다, 구매하다(사다), 획득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 후반부를 "내가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해 엄청나게 지불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15절에서 보듯, 주님은 그들의 안일함에 진노하시지만, 16절에서 보듯 불쌍히 여기시기에 돌아오시게 되고, 17절에서 보듯 먹줄로 구원할 자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시온을 무척 사랑하셔서,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패역하게 하게 살아가는 안일함 때문에 크게 질투하셨지만, 불쌍히 여기심으로, 대신 죄값을 지불하시고, 택하신 자들에게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죄값을 지불하시는 일을 십자가에서 다 하셨던 겁니다. 세상 가운데 대속의 은혜를 선포하고, 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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